<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년 6월 8일 ~ 1959년 4월 9일)는 미국의 근대 건축가이다. 매우 독특한 양식의 건축 설계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생전에도 매우 유명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로 남아 있다. 그의 다채로운 사생활은 많은 머릿기사가 되었으며, 특히 두 번의 이혼과 1924년 그의 탈리진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직원에 의한 방화살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미국 위스콘신주 리치랜드센터에서 태어난 라이트는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을 중퇴하고 시카고에서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아드라 설리번 사무소에 근무하였는데 1893년 시카고 만국발람회의 건축에서 동사무소의 치프 디자이너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1894년 독립한 사무소를 개설하여 처음에는 개인 저택을 전담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대건축에 착수, <힐사이드 홈 학교>(1902), <라킨 비누회사의 빌딩>(1904), <유니티 교회>(1906), <시티 내셔널 뱅크>(1909)등의 작품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을 통하여 루이스 설리번의 후계자로서 시카고파를 지도하면서 미국 건축의 절충양식을 타파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1911년 위스콘신에 자택<탈리어센 웨스트>을 세워 이 두 곳에서 제자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새 건축가의 양성에 힘썼다.
그동안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면서 특히 일본의 <데이코쿠 호텔>과 <자유학원>을 건축하였다. 1930년대의 저명한 작품에는 <존슨회사 사무소>,<카우프만 저택(낙수장)>이 있고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와 <존슨 회사 연구소>와 <웨이파라의 교회> 등이 걸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9년 애리조나주의 피닉스에서 사망하였다.
1. 유년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1867년 미국 위스콘신주 농촌 리치랜드 센터에서 프랭크 링컨 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라이트는 연설가, 음악 선생님, 목사였고 종종 변호사로 일했다. 윌리엄 라이트는 카운티 학교 교사였던 애나 로이드 존스를 만나 결혼했고, 다음 해에 리치랜드 카운티 장학사로 취업했다. 매사추세츠주 출신이었던 그는 위스콘신 주 스프링 그린으로 이민온 번창한 유니테리언 대가족인 로이드 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한편, 애나 로이드 라이트의 형제 중 한명인 젠킨 로이드 존스는 미국 서부에 유니테리언 주의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두 부모는 의지가 강한 성격이었고, 그들의 독특한 관심사들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가 장남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커서 아름다운 건물들을 지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이를 공언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녀는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낸 영국 성당들의 판화로 아기방을 꾸며서 아직 신생아였던 아들이 야망을 갖도록 했다. 1870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가족은 메사추세츠 주 웨이머스로 이사하여, 윌리엄 라이트는 소수의 신도들의 목사로서 봉사했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 1876년 필라델피아 만국 박람회에서 프리드리히 프뢰벨이 개발한 교육용 블럭을 보았다. 이 블럭은 프뢰벨의 혁신적인 유치원 교육 커리큘럼의 기반인 프뢰벨 선물세트였다. 교육자인 애나 로이드 라이트는 이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갖고 한 세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오랜 시간동안 이 세트를 사지고 놀았다. 이 세트에 들어있는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블럭들을 조합하여 조립하면 수많은 3차원 물체를 만들수 있었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 그는 이러한 놀이가 어떻게 그의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했다. "나는 몇년동안 그 작은 유치원 책상 앞에 앉아서 직육면체, 구, 삼각형을 가지고 놀았다. 이 매끈한 단풍나무 블럭들이 아직도 내 손 안에 있는 것 같다. 그의 건축물의 큰 특징은 기하학적인 명료함이다. 라이트 가족은 웨이머스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윌리엄 라이트가 취업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로이드존스 가문이 있는 위스콘신 주 스프링 그린으로 돌아갔다. 라이트 가족은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 정착하여 윌리엄 라이트는 음악 레슨을 하면서, 매디슨의 신생 유니테리언 단체의 비서로서 일했다. 윌리엄 라이트는 가정적인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의 자식들과 음악,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나누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4살이 되자 그의 부모 사이가 멀어졌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는 윌리엄 라이트의 경제력에 불만을 가졌고, 그에게 가족을 떠나라고 요구했다. 애나 로이드 라이트가 신체적 애정이 없다는 이유로 윌리엄 라이트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고, 1885년 이혼 절차가 완료되었다. 그후 윌리엄 라이트는 위스콘신 주를 떠났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두 번 다시 그의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그의 외가 로이드 존스 가문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의 중간 이름을 링컨에서 로이드로 바꿨다.
2. 교육(1885년 ~ 1887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매디슨 고등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1886년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그는 파이 델타 쎄타 사교클럽에 가입했다. 그는 두 학기 동안 파트 타임으로 수업을 들었고, 토목학 교수 앨런 D.코노버와 함께 일했다. 그는 대학교를 중퇴했지만, 1955년 동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다음시간에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2탄!!!
초기업적, 주요 작품 등을 알아보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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