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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 - 1

피렌체 대성당

위 사진은 피렌체 대성당 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건물 피렌체 대성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피렌첸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대성당(두오모)이다.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돔으로 유명하며, 실외는 하얀색으로 윤곽선을 두른 초록색과 분홍색의 대리석 판으로 마감되어 있다.

 

1.역사

피렌체 대성당은 이전에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고, 피사와 시에나에 새로 지어진 성당들에 자극을 받아 건설되었다. 13세기 말, 당시의 상황을 신간 연대기에 저술한 조반니 빌라니에 따르면 이미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은 점점 붕괴하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인구가 급증하던 이 시기의 피렌체에 비해 성당은 너무 작았다. 점점 번영하던 피렌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 새로운 성당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1296년에 설계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는 산타 크로체 성당과 베키오 궁전의 건축가였다. 그는 세 개의 넓은 중랑이 팔각형 돔 아래에서 끝나도록 디자인했으며, 가운데 중랑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영역을 감싸도록 했다. 피렌체에 파견된 첫 교화 사절이었던 발레리아나 추기경에 의해 1296년 9월 9일 첫 공사에 들어갔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40여 년간 계속되었으며,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했다.

아르놀포가 1302년에 사망하자 대성당의 공사는 30년간 미루어 졌다. 1330년 성 제노비오의 성유물이 발견되면서 공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331년 아르테 델라 라나가 이 공사의 독점적 후원자가 되었고 1334년에는 조토 디 본도네가 공사를 감독하게 되었다. 안드레아 피사노의 조력으로 조토는 캄비오의 설계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조토의 주요 성과는 종탑 건물을 만든 것이다. 조토가 1337년 죽고 나서도 안드레아 피사노는 계속 건물을 만들었으나, 1348년 흑사병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1349년 대성당 공사가 재개되어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후진과 측면 경당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1359년 조반니 디 라포 기나(1360-1369)가 탈렌티의 뒤를 이어 가운데 중랑을 네 개의 정사각형 베이로 나누었다. 그 밖에 알베르토 아르놀디, 조반니 담브로조, 네리 디 피오라반테, 오르카냐 등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1375년에 낡은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헐렸다. 네이브는 1380년 완성되었고, 1418년 오직 돔만이 미완성 상태였다. 실외벽은 수직과 수평으로 교대하는 여러 색의 대리석 배열로 되어 있는데 카라라, 프라토, 시에나, 라벤차 등 기타 다른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대리석 배열은 이미 존재한 인접한 산 조반니 세례당과 조토의 종탑의 벽에 있는 배열이 그대로 반복되었다. 측면에는 카노니치의 문과 만도를라의 문, 아 두 문이 있다. 이 문들은 난니 디 방코, 도나텔로, 야코포 델라 퀘르차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섬세한 트레이서리와 장식이 있는 여섯 개의 측면 창은 필라스터들로 나뉘어 있다. 익랑에서 가까운 네 개의 창문만이 빛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다른 창문은 단지 장식일 뿐이다. 클리어스토리 창은 둥근 모양으로 이탈리아 고딕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대성당의 바닥은 16세기에 대리석 타일로 만들어졌다. 피렌체 의회의 소재지였던 이 대성당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하였고,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1478년 4월 26일 부활절에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2. 돔

15세기 초 대성당의 원통형 부분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단소 위의 42m의 넓은 공간은 1367년부터 이미 벽돌 모형이 존재했음에도 아직 팔각형의 돔을 갖고 있지 않았다. 1419년 아르테 델라 라나는 대성당 돔의 설계안을 공모하는 대회를 열었다. 참여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이 두 사람 있었는데 피렌체 세례당의 '하늘나라의 문'으로 유명한 로렌초 기베르티와 코지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이 대회에서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 의뢰를 맡게 된다. 석재 돔을 건설하는 것은 많은 기술적 문제를 일으켰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영감을 얻으려 했으나, 콘크리트 사용법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브루넬스키는 벽돌을 가지고 돔을 만들어야 했다. 자신의 돔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려고 그는 도나텔로와 난니 디 방코의 도움으로 나무와 벽돌로 된 모형을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는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그의 모형은 장인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으나, 그가 건설 과정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불완전한 상태였다.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천재적인 동시에 전례가 없었다. 지붕 위가아니라 드럼에 얹혀졌으며 이중벽 구조의 8각으로 디자인된 독특한형태의 돔으로, 지면으로부터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전체 돔을 만들 수 있었으며, 또한 이것은 홍예가 없이 건축된 최초의 커다란 돔이었다. 그러나 돔이 외부에 지지해주는 버팀 벽도 하나도 없이 드럼에 얹혀졌기 때문에, 돔의 기초에서 옆까지 수평인장혁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돔의 안전을 위해 브루넬레스키는 돔의 기초에 나무와 철의 세트로 된 수평으로 팽팽한 사슬을 만들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의 무게는 37,000톤이고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도었다. 그는 구조물을 만들면선 여러 모형과 세부 도면을 만들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특수한 기계를 만들었다. 이런 특별하게 설계된 기계들과 탁월한 석공 기술은 브루넬레스키의 건축에 있어서 극적인 공헌이었다. 가장 안쪽의 이중벽 안에 있는 원뿔 표면 위의 원을 베끼는 능력은 스스로 지탱하는 수평 아치의 건설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기하학적 이유로 원형의 평면은 이러한 건립 과정에 필요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조수로 임명된 기베르티는 이런 계획을 무시했고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크게 공격받은 브루넬레스키는 아픈 척하면서 로마로 떠나 기베르티에게 이 계획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곧 기베르티는 곧 전체 계획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시인했다.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독점적인 책무를 인계받았다.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대성당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36년 3월 25일 축성하였다.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졌고 그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이 돔은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브루넬레스키가 돔 위에 랜턴을 어떻게 올려놓을지는 의문시되었고, 그는 다른 설계경기에도 참가해야 했다. 그는 경쟁자인 로렌초 기베르티와 안토니오 차케리를 꺾고 설계경기에 당선되었다. 그는 사방으로 뻗은 버트레스와 여덟 개의 높은 안토니오 차케리를 꺾고 설계 경기에 당선되었다. 그는 사방으로 뻗은 버트레스와 여덟 개의 높은 아치창과 함께 있는 팔각형의 랜턴을 디자인했다. 랜턴의 건설은 1446년 브루넬레스키가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15년간 공사는 조금밖에 진척되지 못했는데, 여러 건축가의 잦은 설계 변경 때문이었다. 랜턴은 브루넬레스키의 친구인 미켈로초가 1461년 결국 완성하였다. 원뿔 혀애의 천장에는 도금된 구리 공과 십자가가 씌워졌는데, 성 유물을 포함하여 1469년 베로키오가 완성하였다. 대성당의 돔과 랜턴의 총 높이는 114.5m에 육박한다. 구리 공은 1600년 7월 17일 벼락을 맞고 떨어져 버렸다고한다. 2년 뒤에 이 공은 더 큰 것으로 교체 되었다.

 

이상 피한체 대성당 첫번째 시간을 마치고 다음시간에는 더 자세한 내용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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