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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앙카 문명 마추 픽추 - 1

마추픽추는 페루에 있는 잉카 문명의 고대 요새 도시이다. 15세기에 남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잉카 제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수면에서 2,430m나 되는 산맥의 정상 위에 위치해있다. 쿠스코에서 북서쪽으로 80km정도 떨어져 있고, 우루밤바 강이 도시가 있는 산맥 아래를 꺾어 흘러가고 있다. 대다수의 고고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파차쿠티 황제가 이 요새 도시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잃어버린 도시'의 이미지로 잉카 문명을 상징하는 유적으로 많이 불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추픽추는 1450년 즈음에 지어졌고, 약 1세기 후에 스페인의 침략과 비슷한 시기에 버려졌다. 이후 주변 현지인들에게만 간간히 알려져 있던 정도였고, 1911년에 미국의 탐험가 하이럼 빙엄이 다시 발견해 내기 전까지 세상에서 잊혀져 있었다. 마추 픽추는 잉카 고전 양식으로 지어졌다. 접착제나 모르타르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채 돌과 석재들을 쌓아 올려 만들어졌고, 주요 건물은 해시계, 태양의 신전, 세 창문의 방 등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페루 정부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복원시켜 둔 것으로,1976년에 전체 유적지의 약 30%정도가 복원되었고 현재도 복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98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새로운 세계의 7대 불가사의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어원

고대 잉카 언어로 마추 픽추의 '마추'는 옛, 혹은 옛날을 뜻하며, '픽추'는 고대 잉카인들이 마약 용도로 주로 사용하던 코카 잎, 피라미드 등을 뜻한다. 때때로 오래된 봉우리라는 뜻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사

마추 픽추는 1450년 ~ 60년대에 지어졌다. 이 도시의 건축은 2명의 왕이 대를 이어 감독하였는데, 첫째는 파차쿠티이고 둘째는 투팍 잉카 유팡키이다. 고고학자들은 파차쿠티 황제가 군사 원정을 끝낸 후, 황제 전용 궁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도시가 약 80여년 간 사용된 이후 버려진 것을 보아, 잉카 황제들에게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나타난 이후, 마추 픽추에 살던 거주민들이 스페인에서 전해온 천연두와 같은 질병들로 인해 모두 사망하였다는 설도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추 픽추에서의 일상

마추 픽추가 황제의 궁전이었을 당시, 이 곳에는 약 750여명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다수는 이 곳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황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대기하던 사람이었다. 또한 종교적, 군사적인 이유로도 이 곳에 사람들이 거주하며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흉년이 들거나 식량이 넉넉하지 못한 때에는, 이 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수를 100여명이내로 줄이고 오직 최소 인원의 제사장들만 남겨두어 제사를 지속시키도록 하였다. 고고학자들이 이 곳에서 출토된 유골들을 조사한 결과, 이 곳에서 제국 각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서로 다양하게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들의 뼈에는 페루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생충들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또한 뼈의 구성 성분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은 모두 각자 먹었던 식량의 종류도 달랐고, 살아갔던 방식 또한 동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대다수의 유골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모두 생애 초기에는 감자, 생선과 같은 음식들을 주로 먹었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산간 지방에서 많이 자리는 옥수수를 많이 먹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 곳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한때 해안 지방에서 살았다고 나중에 이 곳으로 올라와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 유골들의 주인들은, 잉카 제국의 타 지방에서 발견된 유골들에 비해 훨씬 그 노동량이 적었고, 더 풍족한 식생활을 누렸다. 마추 픽추 인근에서 살지 않는 동물들의 뼈가 출토되는 것을 보아, 사람들이 마추 픽추로 올라옴에 따라 가축들도 함께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곳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동물 뼈들은 라마나 알파카의 유해이고, 이 동물들은 보통 해발고도가 4,000m가 넘는 고산 지대에 살기에 고도가 2,000m밖에 되지 않는 마추 픽추에서 이 동물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들을 도시로 끌고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대다수의 동물들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끌려왔고, 신에게 바칠 제물로도 쓰였다. 또한 이 곳의 몇몇 장례용 동굴들에서 기니피그의 뼈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아, 기니피그가 장례용 제물로 많이 쓰였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6마리의 개들이 사람의 무덤에서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죽은 자의 동료로 함께 묻혀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농업

마추 픽추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농업은 계단식 농업이었다. 마추 픽추 인근에는 각각 3m의 높이를 가지는 단들이 모두 40개나 존재하고 있고, 약 3,000m개나 되는 계단들로 이를 잇고 있다. 이 수 백개가 넘는 계단식 밭들을 사용하면, 산사태나 토양 유실의 위험 없이도 충분히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가끔씩 밭들이 무너져 내리거나 산사태로 인해 쓸려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현재 마추 픽추에는 산사태로 인해 밭들이 쓸려나간 흔적과 잉카인들이 이를 다시 보수한 흔적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마추 픽추 주변 지역은 1450년대 이래 연간 약 1,800mm의 강수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잉카인들이 밭에서 주로 재배하던 감자나 옥수수에 필요한 강수량을 충분히 충족했기 때문에, 마추 픽추의 밭에는 특별한 수로 시설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밭에는 너무 많은 강우로 인해 물들이 넘칠 경우를 대비한 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다. 조사 결과, 이 계단식 밭들 아래에는 모두 겹겹이 구성된 층들이 있는데, 맨 아래에는 기반암으로 이루어진 층, 그 위에는 모래와 자갈을 섞어 만든 층, 맨 위에는 흙으로 만든 층이 있었다. 맨 위에 덮여있던 흙들은 모두 계곡 아래에서 직접 퍼 올린 것들이었다.

다만 이계단식 밭들의 총 면적은 고작 4.9헥타르 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는 750명이나 되는 인원을 먹여살리기에는 부족했다. 이로 인해 종종 사람들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식량들을 새로 가지고 올라와야만 했다.

 

이상 잉카 문명의 마추픽추에 대해 알아보셨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잉카 문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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